가네마루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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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마루 신은 1914년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나 도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1958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 내에서 활동하며 건설상, 방위청 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킹 메이커'로 불리며 다케시타 노보루를 비롯한 여러 총리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했으나, 1992년 불법 정치 자금 수수 사건과 탈세 혐의로 체포되어 의원직을 사퇴하고 1996년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또한, 북한과의 유착 의혹과 금권 정치 논란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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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마루 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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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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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金丸 信 (かねまる しん) |
출생일 | 1914년 9월 17일 |
출생지 | 일본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이마스와촌 (현 미나미알프스시) |
사망일 | 1996년 3월 28일 |
사망지 | 일본 야마나시현 |
학력 | 도쿄 농업대학 전문부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紺綬褒章 (콘주호쇼) |
배우자 | 전처: 가네마루 레이코 (-1958년) 후처: 가네마루 에쓰코 (1961-1991년) |
정치 경력 | |
직책 | 부총리 겸 민간 활력 도입 담당 대신 |
내각 | 제3차 나카소네 내각 |
임기 시작 | 1986년 7월 22일 |
임기 종료 | 1987년 11월 6일 |
직책 | 제35대 방위청 장관 |
내각 |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 1977년 11월 28일 |
임기 종료 | 1978년 12월 7일 |
직책 | 제3대 국토청 장관 |
내각 | 미키 내각 |
임기 시작 | 1974년 12월 9일 |
임기 종료 | 1976년 9월 15일 |
직책 | 제34대 건설대신 제14대 긴키권 정비 장관 제10대 주부권 개발정비 장관 제23대 수도권정비위원회 위원장 |
내각 |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
임기 시작 | 1972년 12월 22일 |
임기 종료 | 1973년 11월 25일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야마나시현 전현구 |
당선 횟수 | 12회 |
임기 시작 | 1958년 5월 23일 |
임기 종료 | 1992년 10월 21일 |
기타 직책 | |
직책 | 자유민주당 부총재 |
총재 | 미야자와 기이치 |
임기 시작 | 1992년 1월 |
임기 종료 | 1992년 8월 |
직책 | 제26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
총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임기 시작 | 1984년 10월 |
임기 종료 | 1986년 7월 |
직책 | 제27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총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임기 시작 | 1983년 |
임기 종료 | 1984년 |
직책 | 제16·24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
총재 |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
임기 | 1971년 - 1972년 |
총재 | 오히라 마사요시 |
임기 | 1978년 - 1980년 |
군 복무 정보 | |
소속 국가 | 일본 제국 |
군종 | 육군 |
복무 기간 | 1938년 |
계급 | 하사 |
부대 | 제2중대 전신 3중대 관동군 |
2. 생애
가네마루 신은 1914년 9월 17일 야마나시현 미나미알프스시에서 태어났다.[2] 도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관동군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3] 제대 후에는 청주 양조 사업, 콘크리트 및 기념품 사업 등에 관여했다.[3] 자유민주당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의 일원이었으며, 아들 가네마루 신고를 두었다.[5] 1996년 3월 28일 야마나시현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958년 |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나시현 전 지역구, 자유민주당 공인) 당선 |
1971년 | 자유민주당 야마나시현 지부 연합회 회장 취임 |
1972년 |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위원장 취임, 건설대신 【킨키권 정비 장관 겸 주부권 개발 정비 장관 겸 수도권 정비 위원회 위원장 겸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취임 |
1974년 | 국토청 장관 (미키 내각) 취임 |
1976년 | 중의원 의원 운영 위원장 취임 |
1977년 | 방위청 장관 (후쿠다 내각 개조 내각) 취임 |
1978년 |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위원장 취임 |
1983년 | 자유민주당 총무 회장 취임 |
1984년 | 자유민주당 간사장 취임 |
1985년 | 공부회 창정회 결성 |
1986년 | 국무 대신 【부총리 겸 민간 활력 도입 담당】 (제3차 나카소네 내각) 취임 |
1987년 | 경세회 (다케시타 파벌) 결성, 경세회 회장 취임 |
1992년 | 자유민주당 부총재 취임, 자유민주당 부총재 사임, 중의원 의원 사직, 경세회 회장 사임 |
2. 1. 학창 시절과 정계 입문
1914년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이마스와촌(현 미나미알프스시)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는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야마나시 교통전차선의 뿌리인 고후 전차 궤도의 중심 인물이었고,[41] 삼촌은 현 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가네마루 가는 많은 고용인을 부릴 만큼 부유한 집안이었다.니시노 소학교를 졸업한 뒤 구제 고후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품행이 불량하여 퇴학당했다. 이후 아버지의 친구가 교장으로 있던 구제 미노부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다만 고후 중학교 입시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미노부 중학교에 진학했다는 얘기도 있다.[41] 미노부 중학교에서 처음엔 검도를 배웠는데 시합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뒤 검도를 싫어하게 됐고 이후엔 유도를 배웠다.
1933년 도쿄 농업대학에 입학했는데 이때도 유도에 빠져 지냈다.[41] 대학 졸업 논문으로 야마나시현의 명물이기도 한 버찌를 주제로 「버찌 재배의 진화」를 썼다. 다만 이 논문은 태평양 전쟁 때 대학이 공습을 당해 소실되었다. 농대를 졸업한 뒤에 미노부 중학교 시절의 은사가 교장으로 있던 구제 니라사키 중학교에서 생물학 교사로 일했는데 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치기도 했고 야구부 감독도 겸했다.[41]
1938년 징병되어 입대했다. 만주에 있던 관동군 통신 3연대 제2중대에 배속되었는데 참호전을 하면서 감기에 걸려 늑막염에 걸렸다. 신징에 있는 병원에 입원되어 치료를 받다가 내지(일본 제국 본토)로 돌아갔고 곧 병역 면제 처분을 받았다.[41] 귀국한 뒤에는 이바라키현 구지군에 있던 누나와 매형의 집에서 잠시 요양하다가 본가에 돌아가 가업인 양조장을 물려받고 과수원도 경영했다.
1941년 대정익찬회 야마나시현 지부와 함께 대일본익찬장년단(익장단)이 발족하자 참여했다. 당시 익장단장은 나토리 다다히코였는데 나토리는 전후에 야마나시 중앙 은행장이 되어 야마나시현의 정·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가네마루는 이때 나토리와 친분을 쌓았다.[42] 1943년 야마나시현 주조 조합 상무이사에 취임했는데 전쟁이 격화되자 정부가 양조장의 규모를 줄일 것을 명령했다. 가네마루는 자발적으로 양조장을 폐업한 뒤 동업자들에게도 명령에 따를 것을 촉구했다. 그 후 군수산업의 용접에 사용할 산소를 만드는 일동공업을 설립했다.[41]
전후에는 쇼추를 만드는 중앙발효화학공업을 설립하여 큰 이윤을 남겼다. 또한 나토리의 도움을 받아 폐업할 예정이던 후쿠센 양조공업의 와인 공장을 매입했는데 여기서도 많은 이윤을 남겼다.[41] 가네마루의 와인 공장에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 세무서가 술을 밀조해서 세금을 탈루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자 화가 나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2. 2. 정계 진출과 자민당 내 활동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공직 추방을 당했다.[43] 1951년 야마나시현지사 선거 때 아마노 히사시가 당선됐는데, 가네마루는 아마노가 용공분자라며 그를 적대했다.현지사가 된 아마노는 가네마루와 관계 개선에 나섰고, 가네마루도 자연스럽게 아마노와 가까워졌다. 1953년 제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가네마루는 아마노의 추천을 받은 히로세 히사타다 캠프에서 선거를 도왔다. 선거가 끝난 뒤 매수 의혹을 받은 가네마루가 현경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는데 증거품인 명함 5장을 먹어 삼켜 버려 기소를 면할 수 있었다.[41]
선거 유세를 도운 것을 계기로 가네마루는 중의원 진출을 꿈꾸게 되었다. 사토 에이사쿠의 파벌인 주산회에 가입했다.[44]
1958년 5월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민당의 공천을 받아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1위로 당선에 성공했다. 당선 동기는 아베 신타로, 구라나리 다다시 등인데 특히 다케시타 노보루와 친했다. 훗날 가네마루의 장남이 다케시타의 장녀와 결혼해 둘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그런데 당선되고 불과 한 달 만에 아내가 협심증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닥쳤다.[44]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문제로 국회가 소란스러울 때 중의원 의장 기요세 이치로를 업어 의장석까지 옮겨 회기를 연장한 끝에 조약 개정안을 가결할 수 있었다.[44]
1961년 재혼했는데 이때 중매를 선 주산회 간부 호리 시게루를 정치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45] 1963년엔 우정정무차관이 되었다.[45]
1972년 1월 간사장이 된 호리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이 됐다. 국대위원장은 각료 경험자가 취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입각 경험이 없던 가네마루가 국대위원장이 된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꼽혔다.[45] 이후 진행된 1972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당인파 출신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다.[45]
총재 선거에서 가네마루가 크게 활약하자 다나카는 가네마루에게 건설상 자리를 약속했다.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발족하자 건설상이 되어 첫 입각을 이루었다.[45]
직후 출범한 미키 내각에선 국토청 장관에 취임했다. 가네마루는 미키에게 중의원 해산을 권했지만 미키는 각료의 대부분이 해산에 반대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해산을 결단하지 못했다. 미키의 태도를 우유부단하다고 여긴 가네마루는 미키를 불신하게 되었고 미키 끌어내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가네마루는 오히라 마사요시가 후쿠다와 다이후쿠 밀약을 맺었는데 보증인 중 한 명이 가네마루였다고 한다.[46] 후쿠다가 총재가 된 뒤 가네마루는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이 되었다.
1977년 11월 후쿠다 다케오 내각 (개조)에 방위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1978년 주일 미군 기지에서 일하는 일본인 종업원에 대한 급여를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고 표명했다. 반발이 일어나자 가네마루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여기서 배려 예산이란 표현이 등장했고 이 표현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같은 해 후쿠다는 총재 선거에 출마해 재선을 노리고자 했다. 가네마루가 "대의명분이 없는 해산에는 반대한다. 해산이 각의에 올라오면 서명을 거부하겠다"라고 공언했다.[48] 결국 후쿠다는 중의원을 해산하지 못한 채 총재 선거에 임했고 40일 항쟁을 유발하게 된다.
제1차 오히라 내각이 출범하자 가네마루는 두 번째 국대위원장 임기를 시작했다. 1979년 3월 호리가 사망했다.
1980년 5월 헌정 사상 최초로 양원 동시 선거가 진행되었다. 가네마루는 이번 선거에서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처신을 긍정할 수 없었고, 나카소네가 자민당 총재가 되기 전까지는 일본 제일의 나카소네 혐오자를 자처했다. 스즈키 젠코 내각 말기에 열린 나카소네 파와 다나카 파의 요정 회합 때, 표면적으로는 화해했다고 여겨졌으며, 그 자리에서 나카소네는 가네마루를 평했다.
1984년, 오자와 다쓰오를 지지하는 다나카의 의향에 반하여 나카소네 총리는 가네마루를 간사장으로 지명했다. 이듬해 1985년, 다나카 파 내에 스터디 그룹 "창정회"를 결성한다. 1987년 7월에 독립 파벌 "경세회" (다케시타 파)를 발족시킨다. 다케시타의 총리 취임 후에는 가네마루가 경세회 회장에 취임했다.
1989년, 소비세 도입으로 인한 인기 하락과 리크루트 사건이 발각되어, 다케시타 내각은 총사퇴, 다케시타는 근신했고, 후임 총재에는 우노 소스케가 취임했지만,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가네마루는, 전 총재인 후쿠다 다케오를, 고령이기는 하지만 후임 총재로 옹립하려 했기 때문에 체면을 잃었다.
1989년 참의원 선거 과반수 붕괴의 참패로 2개월 남짓 만에 무너지자, 최대 파벌의 회장인 가네마루는 큰 힘을 갖게 된다. 뉴 리더들이 리크루트 사건의 영향으로 출마할 수 없게 되자, 야당과의 파이프를 가진 가네마루 자신도 후보로 거론되지만, 다케시타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고, 일본 사회당의 마돈나 붐에 관해 "바의 마담이 당선된 것 같은데 정치를 알겠어? 국가 국민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정치인이 태어나는 것은 문제다."라고 발언했다.
가네타케소라고 칭해졌다. 가네마루는 다케시타 파 7봉행 중에서도 특히 오자와를 눈여겨보고, 1989년 8월, 다케시타의 반대를 무릅쓰고 47세의 젊은 나이로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시키는 등, 오자와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지만, 이후 다케시타 파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
국회대책위원장을 맡아 일본 사회당 의원과 교류하며, 사회당과의 연계를 통해 당내 대립을 제어하는 수법을 익혔다. 1980년대 말부터, 자민당과 사회당을 해체, 재편성하여 정권 교체를 하는 양당 체제를 만들겠다는 정계 재편 구상을 품게 되었다.
1990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북한 방문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14]。 같은 해 9월에는 일본 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 등과 방북단을 단장으로 편성했다(가네마루 방북단). 가네마루와 김일성은, 일본어를 사용하여 단독으로 대담을 가졌다. 시게무라 도모타카에 따르면, 이 회담의 서두에서 김일성은 가네마루에게 "조상님이, 우리나라에서 건너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15]고 한다.
이때 자민당 대표로서 국교 정상화와 통치 시대의 보상과 함께 '남북한 분단 후 45년에 대한 보상'이라는 약속을 자민당, 사회당, 조선로동당 3당에서 체결했다. 이 약속은 귀국 후 "머리 숙여 사죄 외교"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때, 1983년 북한 병사 민홍구의 망명 사건과 관련하여 북한에 스파이로 체포되어 7년간 복역했던 "제18 후지산마루"의 일본인 선장 홍분용과 기관장 구리우라 요시오 2명의 석방, 귀국에 대해서도 합의했고, 이쪽은 실행되었다.
1991년10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초 오자와 이치로에게 출마를 권유했지만 본인이 고사했고, 타 파벌의 영수를 옹립하기로 했다. "심정은 밋짱이지만,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밋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미야자와로 가자."[16]라고 말했다. 도쿄대 출신 이외의 사람을 노골적으로 깔보는 버릇이 있던 미야자와를, 가네마루는 원래 몹시 싫어했다. 미야자와는 자파의 마스오카 히로유키를 국회대책위원장으로 기용했지만, 마스오카는 국대 경험이 부족하고 야당과의 파이프도 없었고, 미야자와는 PKO 협력 법안의 성립과 정치 개혁의 실현을 목표로 했지만 PKO 협력 법안은 계속 심의되었고 정치 개혁은 진전되지 않았다[16]。 그래서 미야자와는 가네마루를 옹립하는 데 직접적으로 움직여, 자민당 부총재로 취임했는데, 미야자와는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를 이용했다[16]。 미야자와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밝히고 있다. "92년 정초에 부시가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부시에게 "조금 도와주세요. 이 사람(가네마루)의 협력이 당내에서 필요한 겁니다. 당신의 저녁 식사에도 올 테니, 제가 그때 사인할 테니, 한마디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시는 "좋아요, 그런 일이라면 자신 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네마루 씨에게 부시가 "당신의 이야기는 미야자와로부터 잘 듣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세요"라고 말해줬습니다. 그것이 있어서 가네마루 씨는 부총재가 되었습니다"[17]。 가네마루는 부시와의 저녁 식사가 있던 1992년 1월 8일, 자민당 부총재를 수락했고, 정권은 안정되었으며[16], 미야자와 정권의 지주가 되었고, 천황의 방중 결정을 주저하는 미야자와에게 "천황 방중 문제에 대해 결정해야 할 것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빨리 결정하시오"[18]라고 호통치는 등 암약했다.
1992년 3월, 도치기현아시카가시에서 야마오카 겐지의 지원 연설 중에 우익의 총격을 받지만, 탄환은 모두 빗나가 가네마루는 살아남았다[19]。 같은 해 3월 25일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교주, 문선명이 특례 조치로 14년 만에 일본에 입국했다. 같은 해 3월 31일, 가네마루는 도내 호텔에서 문선명과 회담을 가졌다[20]。 같은 해의 사이타마현 지사 선거에서는 하타 와타루의 후임을 둘러싸고, 공시 직전에 쓰치야 요시히코의 지지를 철회하고 야마구치 도시오를 내세우려 했기 때문에 반발을 샀다. 또한 가네마루는 수도 기능 이전의 추진론자였다고 하며, 반대파인 이시하라 신타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가네마루 신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년도 | 사건 |
---|---|
1958년 |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나시현 전 지역구, 자유민주당 공인) 당선 |
1971년 | 자유민주당 야마나시현 지부 연합회 회장 취임 |
1972년 |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위원장 취임, 건설대신 【킨키권 정비 장관 겸 주부권 개발 정비 장관 겸 수도권 정비 위원회 위원장 겸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취임 |
1974년 | 국토청 장관 (미키 내각) 취임 |
1976년 | 중의원 의원 운영 위원장 취임 |
1977년 | 방위청 장관 (후쿠다 내각 개조 내각) 취임 |
1978년 |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위원장 취임 |
1983년 | 자유민주당 총무 회장 취임 |
1984년 | 자유민주당 간사장 취임 |
1985년 | 공부회 창정회 결성 |
1986년 | 국무 대신 【부총리 겸 민간 활력 도입 담당】 (제3차 나카소네 내각) 취임 |
1987년 | 경세회 (다케시타 파벌) 결성, 경세회 회장 취임 |
1992년 | 자유민주당 부총재 취임, 자유민주당 부총재 사임, 중의원 의원 사직, 경세회 회장 사임 |
2. 3. '킹메이커'로서의 역할과 몰락
가네마루 신은 정계의 풍향계로 불리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매우 싫어했지만, 나카소네가 총재가 된 후에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간사장, 부총재 등 요직을 맡았다. 1985년 다케시타 노보루가 주도한 창정회 발족과 다나카 가쿠에이의 뇌경색 발병 이후, 다케시타는 파벌 내에서 우위를 점했고, 1987년 경세회를 결성하여 가네마루가 회장이 되었다.가네마루와 다케시타는 오랜 동료였지만,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서 갈등을 빚었다. 다케시타가 소비세 도입과 리크루트 사건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후임 총리 선정 과정에서 가네마루와 상의하지 않아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한 후, 가네마루는 총재직을 노렸으나 다케시타의 반대로 실패했다.
가네마루는 일본사회당과의 협력을 통해 자민당 내 대립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혔고, 1980년대 말에는 양당제를 구상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하고, 북일 국교 정상화와 식민지 보상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으나, '도게자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49][50]
199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오자와 이치로에게 출마를 권유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미야자와 기이치를 옹립했다. 미야자와 내각에서 가네마루는 부총재를 맡아 정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1992년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으로 불법 정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치적 몰락을 맞이했다.
가네마루는 5억 엔의 불법 헌금을 받은 혐의로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의원직도 사퇴했다.[57][58] 1993년에는 탈세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재판이 중지되었고, 1996년 뇌경색으로 사망했다.[59][60]
그의 정치 인생은 '킹메이커'로서의 역할과 몰락으로 요약될 수 있다. 권력의 정점에서 파벌 간 갈등, 정치 개혁 시도, 외교적 노력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결국 불법 정치 자금 스캔들로 인해 몰락하고 말았다.
3. 논란과 비판
1992년 사가와큐빈 정치 부패 스캔들로 기소되어 뇌물에 대한 탈세 혐의를 받았다. 1993년 3월 13일, 가네마루의 집에서 최소 5100만달러 상당의 무기명 채권과 수백 파운드의 금이 발견되어 체포되었다.[4]
3. 1. 금권 정치와 부패 스캔들
1992년 8월,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에서 도쿄 사가와큐빈으로부터 5억 엔의 불법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가네마루는 부총재를 사임하고 도쿄 지방 검찰청에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을 인정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9월에 도쿄 간이 재판소로부터 벌금 20만 엔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 형량이 가볍다는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가네마루는 10월 14일 의원직 사직을 선언했고 21일에 사직이 수리되었다.[57][58] 경세회 회장직도 사임했다.1993년 3월 6일, 정치 자금을 유용해 개인 자산을 모으고 탈세한 혐의로 도쿄지방검찰청에 체포되었다. 검찰은 가네마루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약 1842.3억엔의 소득을 숨기고 1037.75억엔을 탈세했다고 발표했다. 수사 당시에는 죄를 인정했지만, 보석 후에는 정계 재편을 위한 자금이었다고 주장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 무렵 가네마루는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었고, 왼쪽 눈은 백내장으로 거의 실명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받기 위해 고후시에서 도쿄 지방 법원을 오갔다. 그러나 가네마루의 건강을 우려한 가족들의 요구로 1996년 3월 21일 공판은 중지되었다. 그리고 1주일 뒤인 3월 28일 뇌경색으로 사망했고,[59] 재판소는 공소를 기각했다.[60]
2006년 4월 2일, 사망 10주기를 맞아 미나미알프스시에 높이 약 7m, 폭 약 2m 크기의 가네마루 현창비가 설치되었다. 이 자리에는 자민당 국회의원, 야마나시현지사, 야마나시현의회 의원과 야마나시현의 시장, 촌장 등 360여 명이 참석했다.
3. 2. 북한과의 유착 의혹
金丸信|가네마루 신일본어은 시마네현 출신의 다케시타 노보루와는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났지만, 중의원 동기 당선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어 점차 맹우가 되었다. 가네마루의 장남과 다케시타의 장녀는 결혼하여 슬하에 손자까지 두었다.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항목 | 가네마루 신 | 다케시타 노보루 |
---|---|---|
출신 가문 | 양조장 집안 | 양조장 집안 |
부친 경력 | 현 의원 (데릴사위) | 현 의원 (데릴사위, 본인도 현 의원 경험) |
교원 경험 | 구제 중학교 '박물' | 신제 중학교 '영어' |
유도 | 유도 5단 | 유도 5단 |
대학 | 도쿄 농업대학 (사립, 구제) | 와세다 대학 (사립, 구제) |
결혼 | 전처와 사별 후 재혼 | 전처와 사별 후 재혼 (전쟁 중 사별, 후처 맞이) |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다나카 파벌 내에서는 '가네마루·다케시타'로 항상 함께 불렸다. 처음부터 다케시타는 내각총리대신, 가네마루는 중의원 의장을 목표로 했다고도 한다. 신인 의원 시절, 도쿄에서 선거구가 가까운 가네마루의 지역구인 야마나시에서 오는 많은 진정(陳情)객을 기다리게 하는 데 다케시타의 의원 사무소를 사용하기도 했다. 다케시타의 선거구는 도쿄에서 먼 시마네였기 때문에, 말단 의원 시절에는 진정객도 적었다.
3. 3.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과의 관계
1998년 문예춘추 6월호에 따르면,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실행범 김현희의 증언으로 시작된 리은혜 납치 용의 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한국 측의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경찰청은 10여 명 규모의 「리은혜 신원 확인 조사반」을, 경시청 공안부는 「우네 팀」을 설치했다[35]。 각 도도부현 경찰 경비부외사과에도 비슷한 팀이 설치되어 전국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35]。수사 결과, 다구치 야에코(조선명, 리은혜) 납치 관련 인물로 재일 조선인 실업가 3명이 지목되었다[35]。 이들은 조총련 간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고액 헌금, 방북 시 국빈 대우를 받는 거물 상인, 그의 부하 2명 (위장 전향하여 위조 여권을 숨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작원, 해안 납치 범죄를 돕는 「연안 배회인」)이었다[35]。 이 자료는 「무카고」 리스트로 불렸다[35]。
1990년 5월 초, 경시청, 경찰청, 검찰청, 경시청 공안부 외사 제2과 등 관계 간부 약 150명이 소집되어, 거물 상인(조총련 간부) 수색 영장(5월 10일자)과 위조 여권 소지 공작원 체포 영장(5월 14일자)이 준비되었다[35]。 조총련 본부, 조선대학교 수색 영장도 발부되어 기동대 포함 450명 체제로 수사 예정이었으나, 5월 9일 갑자기 중지되었다[35]。 함구령이 내려졌지만, 같은 해 9월 가네마루 방북으로 덮였다는 정보가 있다[35]。
2001년 12월 16일 산케이 신문은 「조총련 전 간부의 외국인등록법 위반 - 고(故) 가네마루 씨 수사에 압력」이라는 제목으로, 1990년 5월 경시청 공안부의 조총련 전 간부 등 외국인등록법 위반 사건 수사 과정에서, 자민당 가네마루 신 전 부총재가 조일 관계 영향을 우려하여 수사 확대 방지 압력을 가했고, 조총련 중앙본부 및 조선대학교 가택 수색이 이뤄지지 않아 수사 불충분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보도했다[35]。
다구치 야에코 납치 사건 진상 규명 시도는 가네마루 신의 압력으로 크게 방해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다[35]。
4.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 회차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1958년 중의원 총선거 | 28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9,354표 | 17.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중의원 총선거 | 29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71,435표 | 18.5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중의원 총선거 | 30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2,206표 | 15.9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6년 중의원 총선거 | 31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71,339표 | 17.4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9년 중의원 총선거 | 32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8,660표 | 17.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2년 중의원 총선거 | 33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102,954표 | 27.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6년 중의원 총선거 | 34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7,609표 | 14.2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중의원 총선거 | 35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92,007표 | 19.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중의원 총선거 | 36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86,919표 | 18.4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3년 중의원 총선거 | 37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96,449표 | 21.2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6년 중의원 총선거 | 38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112,530표 | 22.8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0년 중의원 총선거 | 39회 | 중의원 야마나시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101,756표 | 19.7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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